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(문단 편집) === 데뷔와 초기작 === 1940년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국립테헤란예술대학교에서 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. 대학 졸업 후 CF와 영화 타이틀 디자인 등의 작업에 참여하던 그는 1969년 아동지능 개발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며 어린이들의 교육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, 어린이들을 위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. 이 연구소에서 만든 그의 첫 작품이 단편영화 <빵과 골목(Nan va Koutcheh)(1970)>이다. 이 영화는 이후 만들어지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. [[https://youtu.be/ACLgZ0dyaeU|빵과 골목]]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이란 영화는 '이란 뉴웨이브'로 일컬어지는 세대로, 테헤란 영화제를 통해 해외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는 가운데 키아로스타미를 포함해 호르흐 파로카자드[* 파로카자드는 다큐멘터리 감독임과 동시에 시인으로써 1970년대 이란 현대시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했다.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<[[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]]>의 제목 또한 그녀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.], 파로크 가파리,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, 다리우스 메헤르지 등의 감독들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찍었다. 사회적 검열을 피해 이들은 보다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감독의 의도를 영화 내부에 배치했으며, 이 중에서도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의 <단순한 사건(A Simple Event)>과 호르흐 파로카자드의 <검은 집(The House Is Black)> 등이 이후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. 이어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1973년 중편 영화 <경험(تجربه, The Experience)>를 연출한 데 이어 1974년 장편 데뷔작 <여행자(مسافر, The Traveler)>를 연출한다. <여행자>는 이란 뉴웨이브의 흐름 속에서 소년의 순수함과 1970년대 초 이란 사회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. >잔꾀 많은 말썽꾸러기 소년 카셈은 축구를 너무나 좋아한다. 공부는 뒷전이고, 축구에 빠져 지내는 카셈은 엄마와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다. 그러던 카셈은 축구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혼자서 240km 넘게 떨어진 테헤란까지 갈 계획을 세운다. 카셈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엄마의 비상금을 훔친 것도 모자라 삼촌의 오래된 카메라로 아이들을 속여 돈을 받아 낸다. 과연 카셈은 테헤란에 가서 축구 경기를 볼 수 있을까? >---- >[[https://movie.daum.net/moviedb/main?movieId=29736|출처]]-다음 영화 이후 <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(منم میتونم, So Can I)(1975)>와 <한 가지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답(دو راه حل برای يک مسئله, Two Solutions for One Problem)(1975)>[* 이 단편 영화에 대해 [[정성일]] 평론가는 '무언가 비밀이 담겨 있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영화, 수백번을 반복해서 보고 싶은 영화' 라고 평했다.]의 두 단편 영화를 찍은 후, 1976년 두 번째 중편 영화 <결혼식 의복(لباسی برای عروسی, A Wedding Suit)>을 연출한다. 부유한 가정에서 주문한 결혼식 의복을 가지고 세 명의 빈곤층 소년들이 벌이는 갈등을 다루는 <결혼식 의복>은 그의 서스펜스와 사회 내부에 잠재된 폭력을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. 이어 1977년에 두 번째 장편 영화 <보고서(گزارش, A Report)>를 공개한다.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처음으로 '아동과 청소년 지능 개발연구소'의 지원 없이 상업적으로 찍은 영화이며, 그의 영화 중에서도 긴 러닝 타임(112분)을 가지는 매우 우울한 영화이다. 이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로 당국의 탄압을 받았고, <보고서>의 원본 필름은 소실되어 현재 VHS 녹화본만 남아있는 상태이다. 1979년에는 [[이란 혁명]] 직전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모아 수업시간에 벌을 받는 학생들의 두 가지 선택에 대한 의견을 인터뷰한 중편 다큐멘터리 영화 <첫 번째 경우, 두 번째 경우(.قضیه شکل اول... شکل دوم, First Case, Second Case)>를 연출하나, 해당 영화의 몇몇 등장 인물들이 혁명 후 망명을 선택함으로써 개봉이 금지되고 20년 후 감독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뒤에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. 혁명 전후로 많은 사회파 이란 감독들이 망명을 선택했지만,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란에 남기로 결심하고 198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<정돈된 또는 어지러운(به ترتیب یا بدون ترتیب؟, Orderly of Disorderly)>, <합창단(همسرایان, The Chorus)>, <일학년(...اولیها, First Graders)> 등의 단편 영화 및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연출한다.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1987년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<[[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(영화)|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]]>를 연출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